아인스 칼럼
생계형 R&D
“세계 최고”를 말하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연구개발 과제의 목표에는 자주 “세계 최고 수준 달성”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문장은 강하고,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따라와야 할 질문이 있다. 지금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은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어디에 서 있고, 격차는 얼마나 되는가.
이 질문이 빠진 채 선언부터 앞서면, 목표는 전략이 아니라 수사가 된다. 수사는 평가표를 채울 수는 있지만, 기술 지형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생계형 R&D는 다시 자라난다.
PBS 이후에도 남아 있는 구조
한때 PBS 제도가 생계형 R&D의 상징처럼 지목되었다. 과제를 따야 인건비가 나오는 구조가 연구를 단기성과 중심으로 몰아갔다는 비판이었다. 그래서 제도를 완화하고 출연금을 확대했다.
그러나 제도가 바뀌어도 연구의 체감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제 따기형 생계 R&D가 정책 정렬형, 평가 대응형 생계 R&D로 형태만 바뀐 것은 아닐까. 연구는 여전히 문제 해결보다 선정 가능성을 먼저 고민한다.
이 구조 속에서 유행 기술은 자연스럽게 중심에 선다. “AI를 넣어야 한다”는 말이 농담처럼 오가지만, 그 배경에는 정책 방향과 평가 흐름에 맞추려는 합리적 계산이 있다. 기술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선정 확률을 높이는 장치가 되기 쉽다.
닫힌 기획과 동질적 집단
기획보고서는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안과 전략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획의 논리 구조와 가정까지 닫혀 있다면 외부의 검증은 작동하기 어렵다.
기획은 아는 사람끼리, 수행은 익숙한 전문가끼리 이루어진다. 동질성은 효율을 높이지만, 같은 전제와 같은 맹점을 공유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는 범위 안에서 기획하고 아는 범위 안에서 수행한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유지된다.
이 상태에서 “세계 최고”는 분석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 된다. 현재 세계 최고 기술이 어디에 있고, 어떤 구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태계와 표준, 자본과 시간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충분히 해부하지 않으면, 그 목표는 선언에 머무른다.
연구 역량보다 정치력이 앞서는 이유
여기에 또 하나의 불편한 질문이 더해진다. 연구 역량보다 정치력이 있는 연구자가 더 각광받는 것은 아닐까.
이 현상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에 가깝다. 격차 분석이 정밀하지 않고, 가설과 불확실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며, 중간 검증이 데이터 기반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면, 평가는 결국 사람과 설득에 의존하게 된다. 이때 정치력은 합리적 자산이 된다.
연구자는 학습한다. 기술을 깊게 파는 것보다 정책에 맞추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유행 기술을 넣는 것이 설득에 유리하다는 것을, 관계를 관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렇게 형성된 행동 양식은 생계형 R&D를 더욱 공고히 한다.
성공한 실패와 실패한 성공
우리는 실패를 허용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무엇이 실패이고 무엇이 성공인지부터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정작 목적(MOE)을 달성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과제는 종료되었고, 성능 지표(MOP)는 충족되었으며, 평가 점수도 좋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성공한 실패’다. 보고서상 성공이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다.
반대로 형식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가설이 명확했고 격차가 정량화되었으며 무엇이 안 되는지 구조적으로 밝혀져 다음 설계를 위한 지식이 축적된 경우가 있다. 목표 수치는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넓혔다면 그것은 ‘실패한 성공’이다.
생계형 R&D 구조에서는 ‘성공한 실패’가 안전하고, ‘실패한 성공’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평가는 단기적 성과와 형식적 달성 여부에 더 크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평균적 목표와 무난한 선택이 반복되고, 구조적 도약은 어려워진다.
생계형 R&D의 진짜 뿌리
생계형 R&D는 단순히 예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방향 없는 바쁨이다. 격차 분석 없는 “세계 최고” 선언, 닫힌 기획 구조, 동질적 집단, 정량적 검증의 부족, 그리고 정치력이 보상되는 생태계가 결합된 결과다.
문제는 특정 제도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구조를 설계하느냐에 있다. 우리는 과제를 성공시키려는가,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려는가. 세계 최고는 문장인가, 아니면 냉정한 위치 인식과 전략 선택의 결과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성공을 원하는가. 보고서상의 성공인가, 아니면 다음 도약을 위한 축적을 남기는 성공인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지 않는 한, 어떤 제도 아래에서도 생계형 R&D는 반복될 것이다. 미래는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구조 위에서만 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