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스 칼럼
개념의 개념
혁신의 시작은 개념에서 비롯된다
2025년 11월 04일
우리는 기술과 정보, 시스템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AI, 디지털트윈, 스마트시티, ESG 같은 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다. 회의실에서, 강의실에서, 심지어 뉴스 속에서도 이 용어들은 익숙하게 들린다. 그런데 이 익숙함 속에 낯설고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그 용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개념’은 생각을 붙잡아 형상화하는 틀이다. 개념이 없다면 세상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나뭇잎 하나, 돌멩이 하나도 고유한 존재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잎’, ‘돌’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이름들이 바로 개념이다. 개념이 있어야 우리는 비슷한 것을 묶고, 다름을 구분하고, 공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념은 현실을 이해하고 조작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지적 도구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도구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기술은 빠르게 진화하는데, 그 기술을 설명하는 개념은 모호하거나 표피적이다. 특히 디지털 전환(DX)과 AI 전환(AX)처럼 구조적 사고와 추상화가 요구되는 분야에서 개념의 부재는 더 큰 혼란을 낳는다.
“그건 너무 개념적이야.”
이 말은 종종 비현실적이고 실행력 없는 탁상공론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다. 특히 복잡한 시스템일수록 개념이 분명해야 현실적인 해결책이 가능하다. 디지털트윈을 예로 들어보자. 디지털트윈은 단지 현실을 복제한 3D 모델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핵심 구조를 추상화하고, 가상 공간에서 실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설계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의 출발점은 ‘무엇을 어떤 수준에서 어떤 목적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개념 정의다.
개념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추출하는 기술이자,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구조화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곧 실행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디지털 전환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술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이유는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개념 없는 흉내내기 때문이다. 목적도 불분명하고, 구조도 없이 기능만 구현하다 보면, 시스템은 복잡해지고 사람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이러한 개념 부재는 단순한 무지의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과거의 경험, 익숙한 프레임이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내가 다 해봤어”, “그건 이상적인 얘기지”라는 말은, 익숙함이 낳은 무지다. 새로운 시대에선 오히려 그런 익숙함이 가장 큰 리스크가 된다.
AI 시대는 특히 더 그렇다. AI는 우리가 정의한 문제에만 반응할 뿐, 스스로 생각하거나 질문을 만들지는 않는다. 어떤 데이터를, 어떤 구조로, 어떤 맥락에서 해석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사고 능력, 다시 말해 개념적 사고다. AI와 협업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 질문은 개념을 바탕으로 나온다.
개념 없는 혁신은 없다.
‘생각’은 가능성이지만, 그 생각이 의미를 갖기 위해선 ‘개념’이라는 틀로 붙잡혀야 한다. 그리고 그 개념은 구조화되어야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생각, 개념, 실행은 서로 끊어질 수 없는 지적 순환 고리다. 생각은 꿈을 품게 하고, 개념은 그 꿈을 나누게 하며, 실행은 그 꿈을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경계가 있다. 개념은 현실을 단순화하기 위한 도구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개념은 이상적이며 추상적이고, 현실은 복잡하며 유동적이다. 현실을 잘 이해하려면 개념의 유용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 개념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새로운 용어는 반드시 명확한 개념 정의가 함께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은 혁신이 아니라 혼란이 되고, 때로는 기만이 된다. 디지털트윈, ESG, 스마트시스템… 이 단어들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포장된 껍데기를 들고 혁신이라 부르며 헤매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이 개념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 안에서 이 용어는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통하고 있는가?”
“이 개념이 현실 속에선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개념이 살아야 현실도 산다. 개념 없는 디지털트윈은 껍데기고, 디지털트윈 없는 개념은 탁상공론이다. 개념 없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개념이 살아 숨 쉬는 사고, 개념과 현실을 이어주는 추상화 능력, 그것이 바로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진짜 역량이다. 생각이 현실이 되려면, 그 중심엔 언제나 개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