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스 칼럼
AI시대의 역할과 책임(R&R)
자율이라는 말 뒤에 숨은 조직과 책임의 구조
AI가 세상을 흔들고 있다. 조직에 AI가 들어오면서 ‘자율’이라는 말이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AI가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수록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지금 우리가 말하는 자율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R&R의 출발점은 자율이 아니라 책임이다
R&R을 나누는 이유는 일을 쪼개기 위해서가 아니다. 결과에 대해 책임질 사람에게,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 위해서다. 정상적인 순서는 늘 같다. 역할을 맡고 →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 → 그 책임을 지기 위해 권한을 행사한다.
이 순서가 지켜질 때만 자율은 성과로 이어진다. 자율은 먼저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라, 책임을 전제로 허용되는 결과다.
역할은 강조되고 책임은 숨는다
문제는 현실의 조직에서 이 순서가 자주 뒤집힌다는 점이다. 역할은 명확하게 강조되지만, 책임은 흐려진다.
“역할은 여기까지다.”
“절차는 지켰다.”
“규정에 맞게 처리했다.”
이 말들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이 말들만 남는 순간, 판단의 주체는 사라진다. 권한은 행사되었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규정과 절차 뒤로 숨어버린다. 이것이 오래전부터 반복돼 온 R&R의 함정이다. 역할은 관리되지만, 책임은 관리되지 않는다.
AI는 이 함정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AI는 엄청난 지식을 학습했다. 말도 논리적이고, 계산도 빠르며, 판단도 그럴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말한다.
“AI가 추천했다.”
“시스템이 그렇게 판단했다.”
이 문장은 중립적인 설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할은 강조하고 책임은 더 깊이 숨기는 문장이다. AI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판단을 대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판단의 결과를 책임질 수는 없다.
AI에게 R&R을 맡긴다는 것은, 엄청난 지식을 가진 아이에게 조직의 판단을 넘기는 것과 같다. 아이에게 역할은 줄 수 있지만, 책임을 맡기지는 않는다. 사고가 나면 책임은 결국 아이에게 맡긴 어른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감사가 바뀌지 않으면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이 구조가 반복되는 이유는 감사의 질문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조직의 감사는 여전히 이렇게 묻는다.
법규를 지켰는가. 절차에 실수는 없었는가. 하지만 AI 시대의 감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역할을 맡은 주체는 실제로 판단했는가. 그 판단을 하기 위해 권한을 제대로 행사했는가. 그리고 그 결과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AI 역시 마찬가지다. 모델의 성능이 아니라, 그 AI에게 부여한 역할·권한·책임 구조가 실제로 작동했는지를 봐야 한다.
자율은 편의가 아니라 책임의 확장이다
AI 시대의 자율은 일을 쉽게 하기 위한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율은 책임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더 분명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사전 검증 없이 맡긴 판단은 방임이 되고, 경계 없는 자동화는 사고를 부른다. 사후 검증과 통제가 없는 자율은 결국 책임 회피로 귀결된다. AI는 조직을 대신해 책임지지 않는다. 다만 조직이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더 또렷하게 드러낼 뿐이다.
결론
AI(아이)는 어른이 아니다. 아무리 똑똑해 보여도,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는 아니다. 그래서 AI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역할과 책임을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AI에게 자율을 주고 있는 것인가, 일을 쉽게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책임을 회피할 새로운 이유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